20대에는 실로 다양한 글을 써봤습니다. 긴 소설도 몇 편 써봤고 시도 써봤지요. 작가를 목표로 한 것은 아니었고, 당시에는 넘쳐 흐르는 생각의 줄기를 글로 쏟아내지 않고는 못 배겼던 것 같습니다.
시간이 지나 이제는 소설이나 시를 쓰지는 않습니다. 예전만큼 잘 쓰지 못할 것도 알고 있고, 또 글로 무언가를 분출시키는 나이는 지나서인 듯 합니다. 그래도 밤새워 소설을 쓰던 시절은 지금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 때 썼던 소설 한 편의 결말 부분만 잘라 올려봅니다.
날씨는 여전히 금방이라도 비를 내릴 태세였지만, 어쨌거나 덥지 않아서 좋았고 쪼르륵 흘러내리는 물소리와 정체 모를 벌레들이 자아내는 울음소리가 살갑게 다가와서 마음이 편했다. 나도 모르게 두 팔을 벌려 숨을 크게 마셨다. 맑은 공기가 들어오자 가슴속에 맺혀있던 복잡한 심경이 조금씩 녹아내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오길 잘했다.
하류 쪽을 바라보니 아까의 그 커플이 벌써 돗자리를 펴놓고 식사를 하고 있었다. 도시락 통을 꺼내 김밥을 서로의 입에 넣어주는 게 못내 귀여운 모양새다. 남자가 먹여 준 김밥을 오물거리며 웃음 짓는 여자의 모습에 그녀의 모습이 겹쳐졌다. 얼른 고개를 흔들어 털어버리고는 그들과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자 상류 쪽으로 이동했다. 투명하게 빛나는 계곡물을 바라보며, 주위에 널린 조그만 조약돌을 괜스레 발로 짓눌러 보기도 하면서 몇 십 걸음 걸어가니 누움직한 넓은 바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바위 위는 덥지 않은 날씨에 살짝 데워진 듯 따뜻했다, 목이 마르진 않았지만 물통을 꺼내 입을 적셨다. 아침을 먹는둥 마는둥 했는데 배가 고프지는 않았다. 졸음도 느껴지지 않았다.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한 상태였다. 이제 준비는 다 된 셈이었다.
난 바위 위에 정좌하여 크게 숨을 들이쉰 후, 천천히 두 손을 들어 머리를 잡았다. 왼손은 앞이마를, 오른손은 뒤통수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양 손이 제대로 자리를 잡은 것을 확인한 후 난, 머리를 왼쪽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예상했던 대로 얼마 돌리지도 못하고 머리는 멈춰 섰다. 힘을 더 주었다. 목 쪽에 통증이 느껴졌다. 손에 힘줄이 빳빳하게 세워질 정도로 힘을 주었다. 한동안 강하게 저항하던 목이 끼익끼익 소리를 내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목 뼈에서 부스러기들이 떨어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녀의 집에서, 잘 열리지 않는다며 내게 열어달라고 했던 딸기쨈 병이 생각났다. 뚜껑은 불량인지 처음에는 꿈쩍도 안 하다가 한참을 씨름한 후에야 뻥 하는 소리 함께 겨우 열려 주었다. 그녀는 뛸 듯이 기뻐하며 나를 칭찬했다. 그 소리를, 그 장면을 머리속에서 몇 번이나 되감아 보았다. 그녀는 열린 뚜껑을 다시 닫는다. 내게 부탁한다. 나는 다시 한참을 씨름한 후 겨우 뚜껑을 여는데 성공한다. 그녀는 환호하고는 병을 받아 뚜껑을 다시 닫는다. 그리고는 아무렇지 않은 듯 다시 내게 부탁한다.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몇 분이나 씨름했을까. 그 때의 쨈 병처럼 목에서 뚝 소리가 나며 내 머리는 획 하고 돌아가버렸다. 고개를 살짝 숙이니 등이 보였다. 거울이 아닌 내 눈으로 직접 등을 보는 것은 신기한 경험이었다. 생각보다 굽어있는 등이 왠지 처연해 보였다. 머리를 더 돌려서 한 바퀴를 채웠다. 머리와 몸을 이어주는 가교가 다소 헐거워진 느낌이었다. 연달아 두 바퀴를 더 돌렸다. 처음 돌릴 때만 버거웠지 그 다음은 아주 수월했다. 네 바퀴째 돌리자 머리의 무게가 온전히 손에 전해져 왔다. 조심스럽게 머리를 위로 당겨보았다. 묵직한 무게를 토해내며, 머리가 툭 하며 몸에서 떨어졌다. 지금의 내 모습을 보면, 그녀는 그 때처럼 박수를 쳐줄 것인가.
머리를 조심스럽게 가슴팍으로 들고 와서 살펴보았다. 이상하게도 눈은 분명 머리에 붙어 있는데 보고 있는 것은 몸이 아니라 얼굴이었다. 녀석은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표정을 보니 욱하며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이런 표정이라니. 이런 얼굴 꼬락서니라니. 못난 놈. 못난 놈. 나는 경멸을 퍼붓다가 얼굴에 침을 뱉었다. 녀석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계속 바라볼 뿐이었다.
잊고 싶다. 이 안에 든 모든 것과 작별하고 싶다. 더 이상 아무 것도 기억하고 싶지 않고, 아무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 여기에 담겨 있는 어느 것 하나도 다시 가져가고 싶지 않다.
난 큰 숨을 들이쉬고는 단호하게 머리를 하천에 던져버렸다.
놀라는 표정의 얼굴이 순식간에 멀어지더니 퍽 소리를 내며 물 위에 떨어졌다. 그리고는 금세 위로 떠오르더니 천천히 물을 따라 흘러가기 시작했다. 둥둥 떠가며 사라져가는 머리를 한참을 쳐다보았다.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이제야 잊을 수 있을 것 같다. 일어나 엉덩이를 툭툭 털었다. 더 이상 여기 남아있을 이유는 없다.
싸늘한 바람 한 결이 드러난 목을 치고 지나갔다. 문득 춥다. 아니, 문득 덥다. 문득 배가 고프다. 아니, 문득 배가 아프다. 문득 잠이 온다. 문득 소름이 끼친다. 문득 구토감이 밀려온다. 문득 덜덜 떨리게 춥다. 문득 녹아 내릴 것처럼 덥다. 문득 기쁘다. 문득 죽고만 싶다.
아까의 샛길을 따라 걸어 나오는데, 등 뒤 멀리서 여자와 남자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난 신경 쓰지 않기로 하고 걸음을 계속 내디뎠다.
발걸음이 너무나 가벼웠다.
[2008년 6월 14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