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버킷리스트

아래 버킷리스트는 십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사실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는데요, 2026년에 다시 이 글을 읽고 편집하며, 얼굴이 벌개졌습니다. 고향에서의 자전거 여행, 전주에서의 축구 관람… 뭣 하나 대단하고 어려운 것은 없었습니다만 저는 해내지 못했습니다.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싱가포르에서의 어느 주말,
머지않은 미래에 한국에 영구 귀국하게 되면 하고 싶은 일들을 적어봤다.
일종의 버킷리스트였다.
우선 자전거를 타고, 옛날 살던 동네에 가보고 싶다.
국민학생 때 살던 집에서부터 학교까지의 길을 천천히 밟아가며
거리는 어떻게 바뀌었는지 그때 있던 가게들은 그대로인지 되짚어보고 싶다.
6년을 매일같이 다닌 길이니, 한 걸음 한 걸음이 다양한 추억을 소환할 것이다.
하루 날을 잡고 KTX에 자전거를 싣고 다녀와야 하지만,
잊지 못할 여행이 될 것이 분명하다.
전주에 가서 전북 현대 모터스의 경기도 관람하고 싶다.
오랫동안 팬이었던 동갑내기 이동국의 부활을
현장에서 직접 보며 목청 터지게 응원하고 싶다.
소심한 성격이라 군중 속에서 차마
"아직 우리 젊어! 끝난 게 아니라고!"라 외치지는 못하겠지만
그가 공을 잡을 때마다, 슛을 할 때마다 나는 무척이나 두근거릴 것만 같다.
그뿐이겠는가.
전국에 퍼진 친구들을 하나씩 찾아가 사는 얘기도 좀 들어보고 싶고,
단추가 두 개 달린 네이비 슈트에 홍창으로 된 갈색 구두를 매치하여 멋도 좀 부려보고 싶다.
저녁 노을이 그리 아름답다던 석모도에서 인생의 쓸쓸함을 홀로 곱씹어보고 싶으며,
소싯적 즐겼던 프라모델도 오래간만에 다시 만들어보고 싶다.
하지만,
막상 한국에 돌아가게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지금의 소망들을 깡그리 잊거나 무시하고
새로운 일에 적응하기 위해, 혹은 남들 사는 만큼 따라가기 위해
정신없이 살고 있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군대에서도 그랬었다.
제대를 기다리며 내무반에서 빼곡하게 채워놓은 내 버킷리스트는
바쁜 민간인으로서의 삶에 긁히고 찢기고 헤져,
지금은 거기 뭐가 있었는지도 생각조차 나지 않는다.
인생이라는 선 위, 곳곳에서 작성했던 나의 버킷리스트는
단 한 번도 완료된 적이 없다.
삶의 우선순위가 엉켜 있는 어리석은 인생이다.
바빠서, 피곤해서 등 다양한 이유를 대며 중요한 걸 미루기만 한다.
'내일 하면 되겠지'는 '다음에 하면 되겠지'로 바뀐 뒤,
기약 없는 '언젠가는 하겠지'가 되어 버리기 일쑤다.
소중한 것을 귀하게 대하지 못하는 비겁한 인생이다.
친구가 소중하다면서 친구에게 시간을 쓰지 않고,
경험이 소중하다면서 경험에 돈을 쓰지 않는다.
시간과 돈을 쓰지 않는 대상이 진정 소중한 것일까.
나의 말과 행동은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
해야 할 것 앞에 하고 싶은 것을 슬그머니 내려놓고 숨기는 겁쟁이 인생이다.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이라고 수식어를 붙인 일도
당장 만들 다음주 발표 자료 앞에 고개 숙이고 만다.
인생을 무채색으로 덧칠해버리고서는
"어쩔 수 없었어. 나 살기 힘들어."라며 볼썽사납게 변명하고만 있는 것이다.
'한국에 돌아가면 할 일'
이라는 거창한 제목의 버킷리스트를 만들어놓고
그 앞에서 잠시 설렜던 나는,
오래지 않아 고개를 숙이고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버킷리스트는 실현이 될 수 있을까?
[2012년 7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