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생활 오래 하다 보니 일이 지지리도 안 풀리는 날을 무수히 겪게 됩니다. 다만 경험이 쌓이다 보니 이런 날도 그냥 운이 안 좋아서라기보다는 나의 준비가 부족해서, 내가 정신을 놓고 있어서, 나의 임기응변이 부족해서, 내가 더 단단하지 못해 생긴 일이었습니다. 지금은요? 좀 나아졌겠지요!
공항을 잘못 골랐어요
말레이시아에서 내가 살고 있는 집은 쿠알라룸푸르에서 남쪽으로 세 시간 정도 차를 타고 가야 하는 곳이다. 다른 나라에서 이곳으로 들어올 때나 나갈 때는 보통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으로 갔었는데, 말레이시아 직원들이 그러지 말고 싱가포르 창이공항을 이용해보라고 권유를 해주었다. 두 시간이면 충분히 공항까지 도착한다는 것이다.
간만에 싱가포르 공기를 쐬어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번에는 그들의 권유를 따르기로 했다. 하지만 이게 전혀 좋은 선택지가 아니었으니, 교통체증과 각종 검문검색 때문에 세 시간 사십 분이나 걸린 것이다. 체크인 마감되기 삼십 분 전에 겨우 공항에 도착했으니 꽤나 아슬아슬했다. 그냥 하던 대로 할 걸 그랬다.
비행기 티켓이 취소되었다네요
문제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체크인 카운터에 가서 티켓 확인서를 내밀었더니 항공사 직원이 한참을 확인하더니 하는 말, “이거 컨펌이 안 되어 취소된 티켓입니다.”. 2주 전에 확인 메일도 보냈고 하드카피에 사인까지 했는데 인도네시아 여행사 측에서 깜빡하고 진행을 안 한 모양이었다.
그래, 내 언젠가 이런 일이 터질 줄 알았다. 매월 대여섯 번씩 국제선 타는데 지금껏 아무 일 없었다는 게 확률상 이상한 거겠지.
전화 좀 받아주세요
조금 당황했지만 담담한 척하며 티켓 발급해준 인도네시아 직원에게 연락을 취하기로 했다. 핸드폰에는 전화번호가 없어 노트북을 열어 주소록을 확인하려 했는데 웬걸, 공항으로 오는 동안 차에서 일을 하느라 배터리가 다 나가서 컴퓨터를 켤 수가 없었다. 전원을 연결해야 할 텐데 싱가포르 창이 국제공항 내 콘센트는 자물쇠를 일일이 다 채워놓아서 쓸 수 있는 녀석이 하나도 없었다. 뭐 이런 나라가 다 있냐, 전기 그거 얼마 한다고……
도리가 없어서 담당자는 아니지만 그나마 전화번호를 알고 있는 인도네시아 직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토요일이라 너무도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몇 번을 걸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인도네시아 직원이지만 무슬림도 아니라서 기도하는 시간도 아닐 텐데 그거 잠깐 받아주지.
내 돈으로 50만원 짜리 편도 티켓을 샀어요
할 수 없이 기존 티켓은 무시하고 내 돈으로 표를 새로 구입하기로 했다. 회사에서 갚아 주겠지라는 믿음으로.
티켓을 사러 갔더니 이미 원래 예정된 항공편은 벌써 매진이라 두 시간 뒤의 비행기표밖에 없단다. 게다가 현장 구입인지라 가격이 무진장 비쌌다. 싱가포르-인도네시아, 이 가까운 거리를 편도로 가는 게 50만 원이나 하다니! 하지만 다른 방도는 없었다.
그러고 보니 자카르타 공항에서 날 기다리기로 한 사람들이 있다는 게 생각났다. 호텔까지 태워줄 기사 아저씨와 비자 발급을 도와줄 에이전시 아저씨. 이 사람들은 그나마 연락처도 알고 있었고, 또 다행히 전화도 재깍 받아주어 예정이 바뀌었음을 얘기해줄 수 있었다. 허나 기사 아저씨와 에이전시 아저씨를 착각해서 기사 아저씨에게 비자 발급받는 데 이상 없느냐고 헛소리를 해대고 말았으니 이것 참 미안하게 되었다.
비행기표 영수증은 또 어데 갔답니까
겨우 연락 마무리 짓고 체크인 카운터로 가는데, 짐을 정리하다 보니 비행기표를 살 때 받은 영수증이 안 보이는 거였다. 이게 있어야 그나마 비용 청구라도 할 텐데. 아까 앉아 있던 자리로 가봐도, 오고 가던 길을 샅샅이 수색해봐도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이거 이러다 꼼짝없이 50만 원 내 돈으로 물 참이었다. 이거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자리를 잡고 앉아서 차분히 생각을 가다듬었다. 워낙 미리미리 계획을 세워놓고 이에 맞춰 사는 스타일인지라 계획이 어긋나니 당황한 것이 분명했다.
느린 걸음으로 차분하게 다시 영수증을 찾으러 갔다. 다행히 좀 전에 앉아 있던 자리 바닥에 떨어져 있더라. 아까는 안 보이던 것이 이번에 보였다. 하필이면 짧은 바지를 입고 앉아 있던 젊은 여자 두 명 발치라 좀 민망하긴 했으나 성큼성큼 걸어가 익스큐즈 미! 하며 허리를 푹 숙여 냅다 집어왔다. 조금 놀라길래 미안했지만 굳이 사정을 설명하진 않았다.
비행기는 왜 안 뜨는 거예요
무사히 체크인을 하고 비행기에 때맞춰 탑승. 하지만 이건 또 어인 일인지 좀처럼 이륙할 생각을 안 하는 것이었다. 좀 기다려 보니 기장 아저씨가 방송을 통해 비행기가 많아 차례가 많이 밀렸다고 알려주었고, 그렇게 활주로에서 한참을 기다렸다. 한숨 자다 깼는데, 제법 잤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활주로였다.
저기, 나만 밥을 안 주셨거든요
비행기가 마침내 떴다. 무진장 늦었을 것이 분명했지만 괜히 시간 확인하면 마음이 조급해질까 봐 애써 무시했다. 허나 비행기에서도 이상한 일은 그치지 않았다.
저녁 시간 스튜어디스들이 식사를 나눠주는데 늘 그렇듯 알아서 주겠지 하고 한참 책에 머리를 박고 읽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어머나 내 주위 앞뒤 전후 모두 식사를 끝냈고 식기 회수가 시작되고 있었다. 이거 또 뭔 일이냐. 스튜어디스를 불러서 나 아직 밥 못 먹었다 그랬더니 나보다 자기가 더 황당해하더라. 싱가포르 항공 그러면 서비스로 정평 난 항공사 아니던가. 다들 오늘 내게 왜 이러는 거냐고, 대체! 하지만 마음이 곱디고운 나는 스튜어디스를 탓하기는커녕 그들의 식사 정리를 도와주기 위해 허겁지겁 밥을 먹는 예의범절을 지켜주었다.
아, 여러 사람에게 폐를 끼쳤군요
자카르타 공항에 도착했다. 시간을 확인해보니 일곱 시 반이 다 되어 있었다. 원래는 네 시에 도착 예정이었는데.
더군다나 수화물로 부친 짐은 왜 이렇게 안 나오는지, 짐 찾고 공항 나오니 여덟 시 반이었다. 에이전시와 기사 아저씨 모두 잘 만나긴 했지만 너무도 미안한 마음이었다. 죄송하다는 말을 열 번은 넘게 했다. 어떻게 보면 나도 피해자이긴 하지만 나 때문에 손해 본 사람들이 있다는 게 마음이 너무 불편했다. 이 사람들 나 때문에 토요일 저녁을 날려버린 셈 아닌가?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망측한 기분이었다.
그래도 반성합니다
이후로는 다행히 일이 잘 풀려 무사히 호텔에 도착했는데, 여하튼 정말 이상할 정도로 일이 안 풀리는 하루였다.
뭐, 일이라 언제든지 꼬일 수 있지만 더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예상치 못한 일들이 벌어질 때 차분하게 잘 대처하지 못한 자신, 계획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을 때 지나치게 스트레스를 받는 자신이었다.
오늘 상기한 각 장면장면에서의 나의 모습은, 다 내 탓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다지 멋져보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차분하게 대처할 만한 여유를 가지려면 달갑진 않더라도, 더 나이 먹기 전에 계획 밖의 상황을 더 많이 당해봐야 할 것 같다. 뭐든지 더 겪어보면 더 잘 대처할 수 있을 거다.
예전 복싱을 할 때 느낀 건데, 몇 대 맞아봐야 주먹 앞에 차분해지더라고. 좀 더 맞아보자.
(사진은 말레이시아에서 살던 집)
[2011년 6월 5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