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문성의 돈 이야기

21년 전 첫 월급을 받고 쓴 글입니다. 이후 250번 이상의 월급을 받았지만, 현실에 치여서인지 돈에 대한 철학은 처음에 비해 많이 희미해졌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이때의 다짐, 이때의 마음가짐이 옳다고 믿으며, 그래서 '문성의 돈 이야기 2편'은 아직 쓰지 않고 있습니다.
회사에서 첫 월급이란 것을 받게 되었다. 인턴 시절 몇 번 봉급을 타 본 경험 때문인지, 아니면 너무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어서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너무 소박한 액수 탓인지 통장에 입금된 돈을 확인하고도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꼭 써야 할 곳 몇 군데에 이체하고 나니 어느새 팍 줄어버린 초라한 몰골을 바라보며 아쉬운 입맛을 다셨을 뿐이다.
그런데 며칠 지나니까, 내가 뭔가 중요한 단계를 건너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떤 '생각'을 꼭 해야 하는데, 그걸 안 하고 슬금슬금 넘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모른 체하고 싶지만, 지금 건드리지 않으면 가스 불 켜놓고 집 나온 것처럼 끝없이 뒤통수를 잡아끌 것 같은 예감이었다.
현재 내가 서 있는 위치를 재확인한다는 뜻에서, 혹은 앞으로 나갈 방향을 정해 놓는다는 맥락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일, 그것은 바로 돈에 대한 철학을 세워 놓는 일이었다.
이제 나는 이변이 생기지 않는 한 당분간 꾸준히 돈을 버는 입장이 되었다. 세금도 국민연금도 내게 되었다. 그렇지만 기존의 돈에 대한 생각을 그대로 가지고 이대로 살아간다면 결국 돈을 펑펑 물 쓰듯 써버리거나 혹은 정작 필요한 곳에 쓰지 못한 채 불리기에만 급급해한다거나 돈 한 푼 더 벌기 위해 더 소중한 것들을 포기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제대로 갈피와 방향을 잡지 못한 채 헤맬 것만 같았다.
지금껏 돈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 이유도 대지 못한 채 그냥 많이 있었으면 좋겠다, 정도의 단순한 생각만이 내가 돈에 대해 가지고 있던 관념, 그 전부였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이번에 '아 지금 돈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정립시켜 놓지 않으면 길을 잃고 방황하거나 세상의 유혹에 힘없이 넘어가 버둥거리다 결국 내 가족과 이 민족의 장래에 크나큰 위해요소로 자리 잡겠구나' 식의 거창한 고민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지금의 나는 이른바 '사회 초년생', '신입사원', '풋내기' 정도로 불리는 세상 물정 모르는 위치다. 부잣집 도련님 마냥 편하게 자란 것은 아니지만 세상 사리사욕을 초월한 고승처럼 돈이란 이런 것이니라 일장설파할 만한 경험을 해온 것도 분명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풋내기이기 때문에 돈이라는 주제에 대해 마구 지껄여보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일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먼 훗날 이 글을 보고 '그 땐 어렸었지'하며 킥킥 웃는다거나 얼굴을 붉히며 ‘글 삭제’ 버튼을 눌러버리고 마는 그런 날이 온다 하더라도 말이다.
자아. 언제나 그렇듯 긴 서론을 정리하고 본론으로 가자.
돈이 많으면 좋겠냐 적으면 좋겠냐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주저 않고 당연히 많은 편을 택할 것이다. 생각하고 말 것도 없다.
그런데, 왜 돈이 많았으면 좋겠냐라고 묻는다면 신속하게 입을 열 수가 없다. 대체 왜 돈이 많아야 되는데?
…글쎄. 모르겠다.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아서 마이크를 우리 동네 영재들의 산실, 대전 유성구 송강동 송강유치원으로 돌려보도록 하자.
선생님: 우리 민들레반 어린이들! 선생님 봐봐요. 옳지, 우리 친구들 참 착해요! 여러분 선생님이 하나 물어볼게요. 우리는 왜 돈이 필요할까요? 왜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고자 하며 왜 많은 사람들은 돈 버는 것을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고 있는 걸까요?
(민들레반에서 가장 똑똑한 것으로 알려진 새침데기 영희가 손을 반짝 들었다)
영희 : 돈이 있어야 잘 살아요!
선생님: 오오. 우리 영희 어린이, 대답 참 잘했어요. 돈이 많으면 분명 잘 사는 게 맞아요. 성북동 저택 가지고 있는 사람들보고 못 산다는 사람 없고 판잣집 사는 사람 보고 잘 산다는 사람 없는 게 대한민국 코리아의 사회적 통념이죠.
(영희는 득이만만한 미소를 머금으며 친구들을 돌아보았다)
선생님: 근데 영희 어린이. 돈이 많다는 게 잘 사는 거라면, 우린 왜 잘 살아야 하는 걸까요? 대답해 줄 수 있어요? 영희는 지금 잘 살고 있나요?
(영희는 대답을 하지 못해 우물쭈물하다가 왕, 하고 울음을 터트리며 지상 13층인 송강유치원 창문 밖으로 훌쩍 뛰어내려 조퇴를 해버렸다. 이를 바라보고 있던 철수가 부르짖었다)
철수: 돈이 있어야 행복하니까요!
선생님: 좋은 의견이에요! 그런데 철수 어린이. 반드시 돈이 있어야 행복한 걸까요? 돈이 없으면 무조건 불행한 걸까요? '돈'과 '행복'의 상관계수는 '돈 있다'와 '잘 산다' 사이의 관계에 비해 통계적으로 더 유의하다라고 말하기엔 무리가 있어 보이는데… 어때요, 철수 어린이??
(철수는 선생님 말을 듣지 않은 채 코를 후비다 깜짝 놀라 콧속 깊게 손가락을 찔러버리고는 지대한 아픔에 엉엉 울며 민들레반을 뛰쳐나가 버렸다. 이때 철수를 라이벌로 의식하던 영철이가 헬스로 단련된 근육질 팔을 번쩍 치켜올리며 끼어들었다)
영철: 멋있게 살기 위해섭니다. 선생님.
선생님: 오오 좋아요. 영철 어린이. 타워팰리스 같은 집에서 살며 명품 옷으로 치장한 후 멋진 스포츠카 몰며 맨날 골프 치러 다니면 분명 멋있을거예요. 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두근. 그런 비싸고 값진 것들은 분명 한층 삶을 멋있게 해주겠죠? 남들이 부러워하겠어요!
하지만 선생님은 잘 모르겠어요. 그런 비싼 것들을 가지는 것이, 이 짧은 삶의 목표로 삼을 정도로 대단한 걸까요? 그걸 꿈으로 간직한 채 땅값 비싼 내 마음 속 한 자리를 뚝 떼어주는 게, 그게 진짜 멋있는 삶일까요?
(영철이는 이 말을 듣고 깨달음을 얻어 진정으로 멋있는 삶을 살기 위해 황급히 가방을 싸고는 동네 조폭들의 본거지로 알려져있는 송강 성인 나이트클럽을 무너뜨리려 떠나갔다. 그 와중에 민들레반에서 로맨스의 화신이라 불리는 순덕이가 손을 들었다)
순덕: 사랑하기 위해서라지요, 선생님. 아시겠지만, 사랑에는 돈이 필요해요
선생님: 맞아요. 돈 있으면 결혼정보회사에서 등급도 잘 쳐줄 테고 돈 보고 줄 서는 사람 적지 않을 테니 결혼에 분명 유리하겠지요. 그렇지만 되물어볼게요. 돈이 있기에 자신을 사랑하게 된 사람, 돈이 없었더라면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사람과 사는 건 행복한 것일까요.
물론 돈 있으면 가난한 연인들처럼 혼수 때문에 괴로워하지도 않겠고 럭셔리하고 안락한 결혼생활을 할 수는 있겠죠. 결혼은 사랑이 아니라 현실이라잖아요.
그렇지만 순덕 어린이, 그게 진실이라면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서 돈을 더 벌어야하는 걸까요? 더 사랑하기 위해서는 더욱 더 벌어야하고요? 선생님은 부정하고만 싶네요.
(순덕이는 이 말에 충격 받아 아침에 자신에게 오천 원을 쥐어주며 데이트 신청한 영춘이 입에 오천 원을 쑤셔 돌려준 다음 발로 냅다 차버렸다. 영춘이는 순덕이에게 얻어맞아 한동안 혼절하였으나 곧 깨어난 후 발악하듯 부르짖었다)
영춘: 돈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으니까요!
선생님: 그렇죠. 돈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거예요. 가질 수 있는 것도 많고 갈 수 있는 곳도 많고 먹을 수 있는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많을 거예요. 그런데 선생님은 말예요. 지금껏 살아오면서 무언가를 하고 싶어서 돈을 벌겠다는 사람은 거의 못 봤답니다. 돈 생기면 차 사야지. 해외여행 해야지. 회사 때려 쳐야지 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반대의 경우는 별로 없단 말이죠. 돈을 먼저 생각하지 말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 먼저 고민해보세요. 영춘 어린이는 무엇을 하고 싶나요?
(영춘이는 대답 못해 우물쭈물하다가)
영춘: 선생님을 내 여자로 만들고 싶어요!
(영춘의 말에 격분한 원생들과 선생님으로 민들레반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현장에 나가 있던 PD는 다시 스튜디오의 문성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똑똑하기로 유명한 송강유치원 민들레반 아이들도 왜 돈이 많아야 되는지 속 시원하게 얘기를 해주지 못한 것 같다.
난 말이다. 첫 월급을 탄 이 자리에서 당당하게 말하건데 앞으로 꼭, 필요한 만큼의 돈만 바랄 것이다. 필요한 만큼만 모을 것이다. 돈 없어서 사고 싶은 거 못 사 입맛 다시는 아쉬움도 느끼고 몇 달 꼬박 고생해서 조금 비싼 물건 하나 사들고 먼지 후후 불어가며 귀중하게 간직하는 기쁨도 누려볼 것이다. 돈을 억지로 모으기 위해서 내 삶의 소중한 것을 포기하는 바보짓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청소하고 관리하기 귀찮은 넓은 집으로 이사 가고 싶지도 않고, 운전면허도 없으니 비싼 자동차는 있어봤자 쓸 일도 없다. 럭셔리 해외여행은 성격에 안 맞아서 별로고, 내 방 공책만한 화면 크기의 TV로도 충분하다. 돈이 많은 나머지 내 자식이 인생의 쓴맛 모르고 곱게만 자라는 것도 원치 않고, 좋은 옷 못 입어도 그거 이해해주는 사람 있다면 가끔씩 큰 맘 먹고 한 벌씩 사 입는 생활도 재밌을 것 같다.
물론 하늘에서 돈이 뚝 떨어진다면 좋은 집과 비싼 자동차 사고 세계일주 한 세 바퀴 한 뒤 지금 내 방 평수만한 TV에 홈시어터 달고 자식들 럭셔리하게 길러주며 겨울잠바만 280벌 정도 마련하겠지. 무척 재밌겠다. 그런데 그거 내 인생을 걸고 추구할 만한 가치냐 하면 아니올시다라는 거다. 그런 거 못해보고 못 가져보고 죽어도 현재로는 전혀 아쉬울 게 없다.
내 삶에 있어 ‘많은 돈’은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필수요소는 아니다. 그러니 평생을 돈의 사슬에 묶여 질질 끌려가진 않을 테다. 욕심 부리지 않고 내 몫을 정직하게 가져가고, 나보다 못한 이웃들을 위해 내 것을 희생하고, 어제보다 좀 더 성숙한 나와 내 가족을 만들기 위해 돈을 쓸 테다. 현실성 없는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지금으로선 왠지 이루어질 수 있을 듯한 미래다.
여기까지가 ‘문성의 돈 이야기’다.
제목에 '문성의' 란 말을 쓴 것은 내 이름 두 자를 걸고 진지하게 쓴 글이라는 거다. 나중에 생각 바뀌게 되면 '문성의 돈 이야기 2편'을 쓰게 되겠지. 그렇다 하더라도 그 내용이 '돈이 최고다. 돈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가치이자 목적이다'와 같은 내용들로 채워지지 않길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2005년 2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