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일기 쓰기가 어렵다고 일기를 쓴다

1984년에 시작한 일기를 지금 2026년에도 계속 쓰고 있습니다만, 매일 일기 쓰는 것은 여간 고된 일이 아닙니다. “오늘은 이런 내용을 써야지” 하면서 일기장을 펴는 날은 거의 없고, 일기장을 노려보며 무슨 내용을 적을지 고민하는 날이 대부분입니다. 어제도 오늘도 그랬고, 내일도 아마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만, 나이가 들면서 점점 아무 일 없이 평범히 지나간 하루가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하루 이틀 문제가 아니다.
40년 가까이 써 온 일기장을 매일 저녁이면 습관처럼 펼쳐놓지만, 무슨 얘기를 써야 할지 막막한 날이 많다.
어떤 대단한 사건이 있지 않는 한, 난 그 날의 꽤나 많은 시간을 회사 일에 썼을 것이고, 남는 시간의 일부는 아이들을 돌보는 것을 포함한 집안일에, 또 다른 일부는 공부와 독서 등 자기관리나 휴식에 썼을 것이기에 일기에 쓸 주제를 찾기가 진정 쉽지 않다.
회사 일에 이벤트가 많기는 하지만 일기에 박제하여 수십 년 뒤에도 볼 정도로 의미 있는 건 별로 없다.
그저께는 높은 분들에게 보고하는 자리가 있었고, 준비를 잘 해서인지 그럭저럭 잘 넘어갔다.
어제는 회사 사람들 몇몇과 회식했고 술을 섞어마셨기 때문인지 숙취로 새벽에 좀 힘들었다.
오늘은 오전에는 본사에서 미팅 몇 개 들어갔다가 오후에는 지방 출장을 다녀와서 무척 피곤한 날이었다.
이런 것들은 그날그날에는 분명 가장 중요한 일들이긴 했지만 죽을 때까지 남겨둘 일기에 기록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일기는 있었던 일을 쓰는 게 아니라 그 날의 생각과 감상을 쓰는 것이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뻔한 루틴에 따라 사는 평범한 직장인은 딱히 다른 생각과 감상을 매일 자아내기가 쉽지 않다.
매일 산에 가고 들에 가고 유적지에 가야 된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뭔가 어제와 다른 경험을 해야 일기에 쓸 거리들도 많아질 텐데 그냥 어제와 비슷한 하루를, 그저 바쁘게 살다가 끝내는 일이 허다하니 일기를 펼 때마다 서글퍼지는 것이다.
어쩌면 이건, 일기 소재의 문제가 아니라 중년의 인생, 그 자체의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이십 대 때에 비해 몰라보게 줄어든 체력으로, 그때보다 배는 더 많아진 듯한 직장과 가정에서의 책임을 다 하다 보니 매일매일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주말에도 밀린 일을 하거나 밀린 잠을 보충하다 보면 어느새 월요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해보지 않은 경험을 하고, 생각하지 못했던 의미를 찾아내고, 거창한 철학에 도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테다. 이런 중년에게는 어제가 오늘이고, 지난달이 이번 달과 진배 없고, 작년이 올해에 다름 아니다. 365일의 일기가 365개의 이야기로 채워질 리 만무한 것이다.
"오늘은 또 뭘 쓰지?"
일기에 쓸 게 없는, 매일 일기 쓰는 삶이란.
아니,
어제와 지난달과 작년과 다를 게 없는 오늘이란.
됐다.
오늘은 이 고뇌를 일기에 적어야겠다.
[2023년 4월 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