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일기이며, 아래 해석은 늘 장황하게 글을 쓰던 시절인 2004년입니다. 1984년의 일기도, 2004년의 문성닷컴도 이제는 모두 추억이기에 그대로 올려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일기장 중 가장 오래된 책에서 발췌한 것이다.
바로 본문으로 들어가보자.
“오늘은 선생님학태
노래를 볘여은니다
이를은 종달새인니다”
해석하자면 "오늘은 선생님한테 노래를 배웠습니다. 이름은 종달새입니다" 이다.
주위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소시적의 난 제법 '띨빵했다'라고 하는데 꼭 그 때문이 아닐지라도 맞춤법이 저렇게 틀리는 거, 그 나이 때엔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것보다 '볘여은니다'라는 발음하기조차 힘든 미려한 문구를 보라. 뭔가 범상치 않은 미래가 이 아이의 앞에 뭉글뭉글 피어나는 것만 같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다른데 있다. 어린 시절을 회상해보시라. '종달새'라는 동요가 기억나는가?
음, 아마 고개가 갸웃갸웃해질 것이다. 아. 뭐더라? 하면서 눈사이를 한껏 찌푸릴 수도 있겠다.
여기서 힌트.
대부분의 동요는 제목만 몇번 중얼거려봐도 금세 내용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송아지 송아지 얼룩 송아지. 고드름 고드름 수정 고드름 등)
그러나 종달새, 종달새... 아무리 흥얼거려봐도 그 가락은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다. 우리는 종달새라는 동요를 배우지 않았거나 혹은 배웠더라도 매우 마이너한 부류의 동요로 치부하여 하찮게 여겼던 것이다.
혹은 '반공' 두 글자가 여전히 교실 앞 태극기 액자 옆에 붙어 있던 당시 사회적 정황으로 짐작해볼 때 이 동요가 작곡가의 사상문제로 인해 정규 유치원 음악교육과정의 주류에서 배제된 비극적 사건의 희생자로 낙인찍혔을 수도 있다는 가정도 조심스레 제기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물증 없이 심증만으로 이루어진 추측은 위험한 일. 자, 이제는 눈을 그림으로 돌려 그림 속 선생님의 말에 주목해보라.
기 쁠 산 속
기쁘다의 미래형을 써서 앞으로 기쁘게 될 산속? 이상의 오감도도 아니고 동요에 그런 고차원적인 어구가 포함될 리 없다. 정규 유치원 교육과정을 성실히 이수한 당신이라면 쉽게 짐작해낼 수 있을 저 말의 본 뜻. 그렇다.
깊 은 산 속
이다.
음. 종달새라는 동요에는 '깊은 산 속'이라는 구절이 포함되었구나. 이거 새로운 지식이군, 하고 고개를 끄덕인 당신은 17대 국회가 선도할 미지의 신세계를 선도할 자격이 없다. 조금 더 생각해보시라. ‘깊은 산 속’과 어울리는 동요는,
바로, '옹달샘'이다.
뒤를 이어, "누가와서 먹나요"
가 바로 따라 나온다면 완벽하다.
그렇다. 난 옹달샘을 종달새로 알아 들었던 것이다.
당연히, 가사를 잘 못 알아들을 수도 있다. 그러나, “기쁠 산 속 종달새 누가 와서 먹나요” 라는 이 무섭고도 살벌한 가사를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열심히 불렀단 말인가.
저 시절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았던 것일까.
사뭇 궁금하다.
[일기는 1984년 8월이며, 위 글은 2004년 5월 4일 문성닷컴에 올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