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남의 첫인상을 가늠하듯, 남들 역시 나의 첫인상을 판단하겠죠. 싱가포르에서 대규모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여러 나라에서 온 동료들의 첫인상을 적어보고, 동시에 나는 이들에게 어떤 인상을 주고 있을지 생각해본 날의 기록입니다.
어떤 사람을 처음 만나면 우린 자연스레 첫인상을 받게 된다.
오랜 만남에 기반한 것이 아니기에 본질적으로 불완전할 수밖에 없지만, 한번 자리 잡히면 쉽게 바뀌지 않아 이후의 만남에 영향을 미친다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신경작용이라 할 수 있다.
한 가지 재밌는 것은, 이 첫인상은 우리가 말이나 글로 설명을 하거나 하다못해 시간을 내어 의식적으로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다림질할 때 뿌려지는 분무기의 물처럼 산산이 흩어져 사라져버린다는 것이다.
어제 퇴근길 지하철 역에서 당신 앞에 서 있던 남자의 첫인상은 어땠는가? 점심 때 당신 뒤 테이블에 앉아 있던 여자의 첫인상은? 아마 생각나지 않을 것이다. 의도적인 생각 - 나는 이를 첫인상 도출 사고과정이라 부른다 - 을 하지 않았기에 첫인상이 이미 증발해버린 것이다.
그렇기에 일부러라도 첫인상을 생각해 보고 정리해보는 것은 대상이 중요하면 할수록 더욱 의미 있는 일이라 할 수 있겠다. 누군가에 대해 첫인상을 가질 기회는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간단하게나마 지난달부터 싱가폴에서 프로젝트 팀으로 같이 일하고 있는 동남아 여러 나라 사람들의 첫 인상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이는 아마도 사실과 차이가 있겠지만 큰 문제는 되지 않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내 머릿속에서 '첫인상 도출 사고과정'을 거친 후 그 결과물을 개인 홈페이지에 적는 것 뿐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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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사람 (다수): 냉정한 합리주의
프로젝트가 진행 중인 싱가포르 사업장에는 중국계, 말레이계, 인도계가 섞여 있고, 리더는 영국사람인지라 일반적인 싱가포르 사회의 면면을 잘 대변하고 있다. 그런데 서양식 사고방식 때문인지, 사회 분위기 때문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인종과 관계 없이 다들 냉정하다. 자기 일은 똑 부러지게 챙기지만, 말투가 딱딱하고 사무적이라 정이 느껴지지 않는달까.
이 영어 잘하는 사람들이 오케이라, 컴온라, 같이 어미마다 '라'자를 붙여대는 습관은 한 달 내내 들어서 좀 익숙해졌지만 수요일을 '웨드네스 데이'라고 하는 건 아직 적응이 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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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 사람 (3명): 강한 기질
하나같이 세다. 말을 돌려하지 않는다. 불평도 많고 평상시의 말투도 굉장히 강하다. 안 되는 일도 그냥 어렵다, 정도가 아니라 네버 에버가 꼭 들어간다. 영어를 못해서가 아닌 게 싱가포르를 제외하면 다른 동남아시아 사람들보다 훨씬 뛰어난 수준이다. 회사 내에서의 미팅도 다 영어로 한다고 하더라.
말레이계 2명과 인도계 1명이 왔는데, 그 세 명 사이의 묘한 긴장감도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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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사람 (3명): 부드러운 배려
착하고 순하다. 뭔가 반박 의견을 낼 만도 할 때도 그저 고개 끄덕일 경우가 많다. 셋 다 말도 별로 없는데 웃긴 또 잘 웃고, 서로에게 예의 바르며, 나도 엄청 챙겨준다. 계속 어디 같이 가자, 뭐 살 텐데 같이 가서 밥 먹자 해주는데 혼자 와 있는 나로서는 참 의지가 된다. 이런 사람들만 뽑아와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사람 참 편안하게 해준다는 느낌. Suggestion을 '서게스천'이라 말하던 것 정도는 애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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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사람 (2명): 분위기 메이커
둘 다 체형도 굉장히 크고, 밝고 즐거운 사람들이다. 영어도 잘 하는 사람들이 쉬지 않고 농담을 던지는 게 시트콤 프렌즈의 '챈들러' 비슷하달까. 틈만 나면 누굴 놀리는데 그리 기분 나쁘지 않고 많이 웃게 된다. R이 굉장히 많이 들어간, 혀를 굴리는 영어를 해서 처음엔 알아듣기 어려웠지만 이제 적응했다. 아시아 사람들인데 이름이 페르난데스, 곤잘레스라는 것도 좀 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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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사람 (1명): 어려운 영어, 하지만 밝음
한 명뿐이라 더 표본이 작은데, 말수가 별로 없어서 아직 많이 친해지진 못했다. 그래도 늘 친절하고, 내가 농담을 하면 온 얼굴에 주름을 만들며 많이 웃는다.
다만 영어가 쉽지 않다. Circle을 씨르클, survey를 '쑤르페이'라고 발음하고 informal communication을 '인뽀르말 꼬무니께이숑'이라 하더라.
인도네시아 말과 말레이시아 말이 완전히 같진 않지만 둘이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은 이번에 처음 알았다. 자기들끼리는 같은 언어 '바하사'로 얘기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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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사람 (2명): 큰 문화적 차이, 하지만 좁힐 수 있을 듯
같은 아시아계이지만 가장 큰 거리감을 느끼는 사람들이다. 얼굴 생김새도 너무 다르고, 음식이나 문화도 많이 다르다. 하지만 다행인지 여기 온 두 사람은 정말 젠틀하고, 착하고, 더군다나 말을 느리게 해서 그 힘들다는 인도 영어도 무리 없이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이다. 이들 역시 자기네 나라에서 가장 많이 떨어진 나와 문화적 차이를 느끼는 듯한데, 남은 기간 많이 친해졌으면 좋겠다. 인도 영화 보라고 CD를 하나 줬는데, 발리우드의 집단 댄스는 자꾸 생각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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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사람 (3명): 알 수 없는 속내
이야기는 참 많이 하는데 속을 모르겠다. 영어도 특유의 성조가 있는 베트남 말을 하듯이 해서 알아듣지 못할 때가 많지만 그보다 표정과 말이 상반될 때가 자주 있어서 아 이 사람들 뭔가 아직 얘기 안 하는 게 있구나 싶을 때가 자주 있다.
그래도 활발하고 유쾌한 사람들이다. 자기네끼리 싸울 때가 더러 있어 프로젝트 코디네이터로서 조심스럽게 물어봤더니 그냥 평상시 대화를 한 것뿐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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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 (1명): ??
나다. 그들에게 나는 어떻게 인식이 되고 있을까? 말 빠르고, 일은 무진장 열심히 하며, 농담 많이 하고 늘 웃는 얼굴의 사람? 하지만 난 술도 잘 못 마시고, 담배도 안 피고, 당구도 못 치는지라 흔한 한국 삼십 대 남자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그래도 저들도 나처럼, 처음 같이 일하게 된 한국사람인 나를 통해 한국에 대한 첫인상을 조각하고 있을 것이므로 나도 조심스레 하루하루에 임하고 있다. 적어도 나 때문에 우리나라가 욕을 먹어서는 안 될 노릇이잖은가.
한 나라를 이해하려면 많은 사람과 만나봐야 하고 충분한 시간을 현지에서 보내야 함은 물론이다. 그렇지만 이처럼 첫인상 도출 사고과정을 통해 내 생각을 정리해본 후, 이들과 더 오래 일하면서 그 생각을 조금씩 수정하거나 더 두텁게 만드는 것은 분명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이곳에 내가 얼마나 오래 있을지 아직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지만, 사람이든 나라든, 또 일이든, 최대한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우고 돌아가자.
[2010년 9월 26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