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이글파이브와 NRG

스무 살에 쓴 일기입니다. 그때는 몇 살 많은 선배들이 그렇게나 대단해 보였다지요. 다행인지 저는 사십 대 후반에도 여전히 최신곡을 듣고, 어떤 노래는 따라 부르기도 하면서 저 때의 다짐대로 살고 있습니다. 물론 누가 볼 때는 아주 주책이겠지만요.
어제 저녁, 고등학교 동문회 종강 모임이 있었는데, 모일 때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 동문 친구와 선배 자취방에 놀러 다니다가, 나보다 세 살 많은 4학년 형 방에 잠깐 들르게 됐다.
마침 그 형은 노래 하나를 연습하고 있었는데, 뭔지 들어보니 이글파이브의 '궤도'라는 노래였다. 이 노래는 랩이 굉장히 빠르고, 메인 보컬이 변성기를 어떻게 보냈는지 몰라도 거의 여자 목소리의 고음으로 부르는, 꽤나 고난도의 노래다.
하지만 내가 놀랐던 것은 그 형이 어려운 노래를 불러서가 아니라, 그 나이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최신가요를 부르려고 한다는 거였다. 4학년이면 이만저만 바쁜 게 아닐 텐데 이유가 뭐냐고 물어보니, 형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벌써부터 나보다 어린 애들과 벌어지기 시작하면 나중에 결혼해서 애를 가졌을 때, 얼마나 걔 생각을 이해할 수 있겠어?"
답을 들으며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노래를 잘 부르고 못 부르고를 떠나 생각이 멋져 보였다.
그러면서 한편, 의문도 들었다. 그 형 역시 스무세 살 먹은 신세대인데 최신 유행곡을 듣고 부르는 게 왜 당연하다고 느껴지지 않을까. 그만큼 내 주위의 사람들이, 다들 나이에 맞지 않게 빨리 어른이 되어버려서일까.
비슷한 일이 또 있었다. 그날 동문 모임에서 3차로 노래방을 갔더랬다. 어쩌다 보니 나보다 아홉 살 많은, 그러니까 정말 높은 기수의 형과 같은 방에 들어갔는데, 그 형은 워낙 한참 어린 동생들이 있다 보니처음에는 가만히 있다가 한참 뒤에 마이크를 잡았다. 그리고 부른 노래가 무려,
NRG의 '티파니에서의 아침을'이었다.
물론 나온 지 몇 달 된 노래이니 나한테까지 최신 가요는 아니었지만, 동문회 최고 기수라는 그 형의 위치를 생각해볼 때 정말 엄청난 일이었다. 게다가 형은 나이 차가 아홉 살이나 나는 우리랑 놀면서도 우리가 아무런 부담감을 느끼지 않게 배려해주어, 그냥 친구들하고 같이 노래 부르는 기분이었다.
낮에 궤도를 부르던 형의 모습과 이 형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일일이 설명을 하진 않았지만 두 형이 생각하는 건 비슷한 게 아닐까. 고작 노래 하나로 섣부르게 판단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젊게 살려는 노력은 고작 노래 하나에도 충분히 실릴 수 있는 것이다.
새벽에 기숙사로 걸어 돌아오면서 가슴 속에 절절하게, 나도 나이 들면 저렇게 젊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언제, 어떤 노래로 표현될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1998년 6월 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