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세벌식 키보드

나이가 드니 아무래도 새로운 시도를 점점 덜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번 문성닷컴 리뉴얼처럼, 지금의 제가 할 수 있는 무언가를 꾸준히 새로 시도해 보려고 합니다.
참, 세벌식 키보드는 아직까지 잘 쓰고 있습니다.
1999년, 입대를 앞둔 휴학 생활 중 세벌식 키보드를 익혔다.
'과학적 자판 배치'로 인한 속도 및 정확도의 향상과 손목의 피로 절감 의도도 있긴 했지만, 그보다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을 해보고 싶어서가 더 컸다.
세벌식을 쓴다고 하면 대부분 그게 뭐냐고 하시는데, 일반적인 키보드는(두벌식) 왼쪽의 자음, 오른쪽의 모음, 두 파트로 나뉘는 데 비해 세벌식은 초성-중성-종성으로 영역 구분이 되어 있다. 같은 ㄱ이라도 초성인 ㄱ과 종성인 받침ㄱ이 따로 있고, 중성과 종성을 왼손에 몰아줌으로써 모든 글자가 오른손에서 시작하여 왼손으로 끝난 후 다시 다음 글자가 오른손에서 바로 시작되는, 꽤나 리드미컬한 타자가 가능해진다.
거기다가 ㅁ처럼 많이 쓰이는 음소를 두벌식에서는 왼손 새끼손가락에 배정한 반면, 세벌식은 오른손 중지에 주는 등, 사용률에 맞게 손가락이 배치되게끔 해 놓아 오타도 적고 손도 확실히 덜 아프다.
한글창제원리에도 더 부합하는데, 애초에 세종대왕은 자음과 모음의 개념을 만든 적이 없다. 훈민정음 혜례본에도 初中終三聲 合而成字 (초성 중성 종성 세 개가 글자를 이룬다) 라고 적혀 있을 뿐이다.
이 개념이 적용되지 않은 기존 자판은, 예컨대 '발바닥'이라는 단어를 칠 때 ㅂ 바 발 밟 발바 발받 발바다 발바닥으로 가며 중간에 이상한 형태가 나오는데 세벌식은 ㅂ 바 발 발ㅂ 발바ㄷ 발바닥으로, 손으로 쓰는 것과 동일한 흐름을 따른다.
현대 한국인들이 컴퓨터로 발바닥을 쓰기 위해 밟과 받을 거쳐가고 있다는 것을 아시면 세종대왕님도 슬퍼하실 거다.
그리고 두벌식은 저렇게 글자가 뭉쳤다('밟') 풀어졌다('발바')를 반복하며 도깨비불이라 불리는 화면 깜빡임 문제도 있으며, 뭉친 글자에서 오타가 나면 글자를 통으로 지워야 해서 세벌식보다 확연히 복구가 느리다.
이렇게만 쓰면 세벌식이 모든 면에서 더 좋은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 일상에서 세벌식을 쓰는 건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다. 학교 컴퓨터나 PC방 등 공용컴퓨터에서는 쓰기 전후로 계속 설정을 바꿔줘야 하며, 잘 안 쓰는 음소가 새끼손가락 쪽에 몰려 있기 때문에 어려운 글자나 외래어는 오히려 기존보다 치기 어렵다는 단점도 있다. 쓰는 키(KEY) 개수가 많다 보니 휴대폰에는 절대 들어가지 못할 체계이기도 하고..
난 세벌식을 배웠다가, 군대 행정병에 지원하기 위해 다시 두벌식을 익히면서 세벌식을 까먹었고 (키보드는 머리가 아니라 몸이 익히는 것이기에) 군대에서 계급이 올라간 뒤 다시 세벌식을 연습하여 이제는 겨우 두 자판을 동시에 쓸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이 글도 두벌식으로 쓰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하나의 자판을 사용할 때보다 효율은 많이 떨어져서, 세벌식으로 쓸 때는 오타가 늘고 속도가 줄었으며,
두벌식으로 칠 땐 키보드를 매번 힐끔 쳐다봐야 하는 수준이 되고 말았다.
세벌식만 칠 때는 한메타자에서 단문 분당 1,000타를 우습게 쳤는데 이제는 그 절반 정도도 안 될 것이다. 어중간한 결론이 난 것이다.
사실 이런 타자 속도가 어떻고 효율이 어떻고 하는 것 자체가 다 옛날 컴퓨터 학원이 유행할 때의 이야기이고 요즘에는 큰 의미가 없다. 바쁜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중요하지도 않고, 관심을 가지는 사람조차 없다.
그래도 이 소득없어 보이는 세벌식으로의 도전은, 모두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방식에 의문을 가지고 혼자 공부하고 고민하고 수없이 연습한 끝에, 결국 더 불편해지기는 했으나, 인생을 아주 조금이라도 더 특별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내게 주는 좋은 선물이었다고 생각한다.
[2004년 1월 3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