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썼을 때에도 지금에도, 독서는 제 삶의 가장 큰 즐거움이자, 숙제이기도 합니다
2006년부터 매년 읽은 책 목록을 따로 관리하고 있다. 언제 어떤 책을 읽었는지 기억을 되짚으려는 목적도 있지만, 매년 몇 권의 책을 읽었는지 추적하려는 용도가 더 크다. 아무래도 성과 지향적인 사람인지라 매년 초가 되면 올해는 몇 권의 책을 읽겠다고 목표를 정해 놓고 틈틈이 잘하고 있는지를 체크하는 데 이 목록을 활용하고 있다.
이렇게 독서의 질보다 양을 중요시하면 당연히 문제가 많은데, 그중 하나는 정말 별로인 책을 잡더라도 중간에 던져버리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제 절반 정도 남았는데, 끝까지 참고 읽자"
는 식으로, 리스트를 채우기 위해 참고 버티게 된다.
게다가 나는 책을 살 때 보통 인터넷에서 15~20권씩 뭉텅이로 사는지라 이 문제가 더 심각하다. 서점에서 한 권씩 훑어보고 사는 게 아니기 때문에 한 번 책을 사면 꼭 1~2권은 지뢰로 판명되는데, 그 책들도 다 읽으려니 여간 곤욕스러운 게 아니다.
최근에 읽은 책 ‘독서천재가 된 홍대리’가 바로 그런 지뢰였는데, 책을 끝까지 읽으며 스스로의 어리석은 선택에 거푸 볼멘소리를 뱉어내야 했었다. 깊이가 없어서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편협한 주장과 이를 전혀 뒷받침해 주지 않는 논리로, 정말 내가 이 책을 돈 주고 산 게 맞을까, 배송 중 오류로 남의 책이 섞인 게 아닐까 구매목록을 다시 확인했을 정도다.
이 책, ‘독서천재’가 강조하는 것은 무조건적인 ‘다독’이다. 인생이 변하려면 100일에 33권의 책을 먼저 읽고 그다음엔 1년에 365권의 책에 도전해야 된단다. 하지만 이 주장을 받쳐 주기 위해 고전(古典)이나 고사(古事)에서 문장 하나 끌어오지 못하고 구체적 실증 데이터 하나 제시하지 않은 채, 그런 경로를 통해 성공한 가상의 인물들만 그려대면서 ‘너도 얘네들처럼 성공하고 싶지? 그럼 무조건 많이 읽어’라 꼬드기고 있을 뿐이다.
아래는 책 속에 등장하는 ‘멘토’가 주인공에게 권면하는 내용이다.농담이 아니라, 정말 책에 이렇게 적혀 있다.
“우선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우리 시대 성공한 CEO들의 책 100권이죠. 그리고 사무엘 스마일즈의 ‘자조론’ 같은 정통 자기계발책들 100권. (중략) 그리고 마지막으로 리더십을 기르는 책 165권, 여기엔 위대한 인물들을 다룬 위인전과 자서전 평전이 포함되죠”
세상에, 닥치는대로 많이 읽고 보자는 주장에도 아연실색할 지경인데 아예 ‘성공’, ‘자기계발’, ‘리더십’에 대한 책만 읽으라고 설파하고 있다. 대체 독서의 목적이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시집까진 아니더라도 고전이나 현대문학, 예술, 경제, 정치, 역사, 과학, 종교 등 다양한 분야를 만나봐야 지혜가 자라고 생각이 넓어지고 안목이 깊어질텐데 저렇게 주야장천 자기계발만 읽으면 그 생각의 편협함은 어쩐단 말인가.
공교롭게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책의 저자 후기에서 찾을 수 있다. 저자의 말이다.
“그렇게 약 2천여 권의 자기계발서를 읽고 나자 난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독서라는 것은 워낙 다양한 면면을 가지고 있어 그 존재의 목적을 간단히 정의하기란 쉽진 않지만 한 번 시도해 보자면, 일종의 '간접경험을 통해 자기를 확장하는 과정'이다.
문학을 읽으면서 무뎌진 감성을 주무르고 역사책을 통해 세상을 통찰하는 시각을 가지게 되며 정치나 경제 관련 책을 통해 현재의 사회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처럼, 내가 알지 못하는 세상을 남의 지식과 지혜에 업혀 만나고 적절한 고민을 통해 일부는 받아들이고 일부는 거절함으로써 내 사유의 경지, 내 지식의 경지, 내 감성의 경지를 넓혀가는 것이 독서 아니겠냐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 '독서천재'는 독서를 왜곡하고 모욕하는 책에 다름 아니었다.
하지만 이 책을 기어이 다 읽고는 짜증을 내며 책을 던져 버리려던 그 순간 나는,
문득 나를 돌아보게 됐다.
매년 읽은 책 목록을 관리하는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연초면 몇 권의 독서를 달성하겠다 목표를 세우는 자신이 한심스러워졌다. 불과 몇 년 전 100권의 독서를 목표로 하고, 이를 달성했다고 스스로를 칭찬했던 자신에게 낯뜨거움을 느꼈다. 1년 365권, 2천 권의 자기계발서를 읽었다 자랑하는 '독서천재'와 내가 뭐가 그리 다르단 말인가.
그러면서 나는,
문득 이 책을 돌아보게 됐다.
어느샌가 독서의 진정한 의미를 잃어버린 채 다독을 탐닉했던 자신을 반성하게 한 것은 바로 이 책 아니던가. 이 책이 아니었으면 독서에 관한 나의 접근을 다시 생각해보지 않았을 것 아닌가. 그렇다면 이 책 또한 간접경험을 통해 나를 확장해 준, 그야말로 독서의 정의에 딱 부합하는 책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위에 적은 '지뢰'라는 호칭도 취소해야 하는 것 아닐까.
다독을 추구했기 때문에
다독을 강권하는 책을 끝까지 읽으며,
다독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고는
다독을 하지 말기로 결단한 것인데,
이거 나, 제대로 독서하고 있는 거겠지?
(물론 책은 내다 버렸다)
[2012년 4월 8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