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두 개의 발표

말레이시아에서 근무할 때 쓴 이야기입니다. 시간이 오래 지나 두 개가 각각 어떤 발표였는지는 이제는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그때의 깨달음만큼은 아직까지도 잘 기억하고, 여전히 활용하고 있습니다.
지난주 있었던 일이다.
같은 날, 비슷한 분량의 두 개의 리포트를 준비해 오전과 오후 각기 다른 그룹에 하나씩 발표했었는데 두 발표가 완전히 다른 결과를 빚었다.
오전의 발표는 끝나자마자 참석자들이 말굽 소리를 내며 두두두 다가와 저마다 악수를 청하고 어깨를 두드리며 칭찬을 해줄 정도로 잘 한 반면에, 오후의 발표는 그저 그랬다. 흐름이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았고, 왠지 내 영어도 더 버벅거렸다. 중간에 분위기를 살리려고 넣었던 멘트들마저 잘 먹히지 않았다. 다행히 완전히 망친 정도까지 아니라서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진행하기로 합의는 받아냈지만, 끓여놓은 지 두 시간은 된 커피처럼 밍밍한 분위기였다.
이는 내게 꽤나 흥미로운 결과였다.
동일한 날의 발표였고 컨디션도 똑같았다. 참석자가 다르긴 했으나 둘 다 내가 잘 아는 클라이언트들이었고, 주제가 다르긴 했으나, 역시 둘 다 내가 잘 꿰뚫고 있는 내용들이었다. 발표 시간과 자료를 준비하는 시간 역시 비슷했다.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 성패가 갈린 이유는 아래의 세 가지였다.
1.
오전의 자료는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만들었지만 두 번째 자료는 팀원들이 절반 가량을 만들었다. 당연히 미리 확인도 했고 마지막 감수 및 편집도 하였으나 내용이나 구조, 문장에 있어서 완전한 ‘내 자료’가 아니다 보니 바지 무릎에 기워 놓은 천조각처럼 완벽한 동화를 이루질 못했다. 내 옷이 아닌 옷을 입고 격한 운동을 하는 것처럼 일부 내용에서 어색함을 자아낸 것이다. 물론 모든 자료를 내가 다 만들 수는 없지만, 그래도 남이 만든 페이지가 많을수록 더 내 것인 것처럼 시간을 들여 꼭꼭 씹어 소화하고 흡수했어야 했다. 자료를 누가 만들던 내가 하는 발표는, 결국 나의 책임이다.
2.
자료를 만드는 시간은 동일했으나 첫 번째 발표 자료는 발표 전에 따로 리허설을 했고, 두 번째 자료는 그렇지 못했다. 내 나라 말도 아닌 외국어로 하는 발표라 더욱, 미리 연습해보는 것의 차이는 컸다. 리허설을 하지 않고 즉석에서 코멘트를 생각하면서 발표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즉석떡볶이를 개시하는 것과 비슷하다. 나는 미리미리 요리를 해놓고, 계속 맛을 봐가면서 파인 튜닝을 해야 하는 사람이다. 즉석떡볶이는 아직 이르다. 완벽한 음식을 주방에서 만든 후, 손님에게 들고 나와야 할 것이다.
3.
첫 번째 발표 시에는 내가 원하는 대로 마음껏 발표를 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졌지만 두 번째 발표는 그러질 못했다. 발표하는 곳이 개방되어 있고 주변의 분위기가 조용해 조근조근 말해야 할 분위기였다. 중요한 부분에서 톤을 올려 강조하면 미팅룸 주변의 사람들이 필시 불편을 느낄 구조였고, 이를 의식하다 보니 나 답지 않게 아주 착하고 자상하게 발표를 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발표를 하면 난 대체적으로 스스로 만족할만한 결과를 내지 못하는 편이다. 내 장점이 최대한 발휘될 수 있는 환경을 사전에 계산하고 조성하지 못한 실패였다.
컨설팅을 하는 업무상 발표를 부지기수로 하고 있지만, 대략 통계를 내보면 3분의 1 정도는 마음에 들지 않는 결과가 나왔다. 그럴 때마다 단순히 자료를 준비하는 시간이 부족했다든가 그날의 내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라고 치부했었는데 이번 일을 계기로 좀 더 구체적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모든 실패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인생이 그렇듯 회사일도 항상 크고 작은 실패가 있기 마련이다. 실패하지 않는 업무란 없다. 다만 그 실패를 어떻게 살리느냐가 미래에 다가올 실패의 확률을 줄여준다.
지금, 어찌보면 웃으면서 넘어갈 수 있는 실수들도 10년 뒤, 20년 뒤에는 어마어마한 실수로 인식될 수가 있는 법, 오늘 겪은 실패를 잘 살리는 것이 미래의 나를 돕는 길일테다.
실패해서 드러누운 나의 등을 밟고, 한 뼘이라도 더 나아가는 내가 되자.
[2012년 10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