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에 쓴, 지금 보면 많이 미숙한 글이지만 매일 삶과 대화를 시도했던 젊은 날을 생각하며 다시 올려봅니다.
[성]
안녕? 오늘도 많이 춥네.
그래, 지금은 창가에 살그머니 들어오는 햇살보다는 바닥에 깔려 다가오는 냉기에 몸을 떨며 잠을 깨게 되는 계절, 으스스한 기분마저 자연스러워지는 시기인가봐.
매일 새벽 잠에서 깨면 말야. 컴컴한 방의 어둠을 두 손으로 짚고 일어서 주섬주섬 옷을 갖춰입고는 출근길에 나서지. 그러면 저기 길 건너편에서 쏜살같이 달려와 나를 확 껴안으며 어제와 다를 바 없는 의미로 자리매김하는,
삶. 너를 맞닥뜨리게 돼
그 때부터 우리는 앞치락뒤치락 하루 종일 힘겨운 씨름을 벌이고, 내가 파김치가 된 몸을 잠자리에 뉘일 때쯤 되어서야 너는 비로소 하루의 안녕을 고하고 뛰쳐나가버려.
오늘도 역시 그럴 테지? 똑같은 시작이고 똑같은 끝이야. 이렇게 말하기 좀 미안하지만 요즘의 넌 시원한 바람이기보다는 반지하 방에서 한 석달은 머물러있던 답답한 공기 같아. 밋밋하고 그저 피곤할 뿐이야.
좀 더 큰 행복을 던져줄 수는 없는 거니? 좀 더 강렬한 감동으로 내게 다가올 수는 없는거냐고.
[삶]
안녕. 성.
나도 추워, 요즘엔.
새벽에 집앞에서 손을 호호 불며 네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는게 슬슬 힘들어지고 있어.
그런데 너 또 울적해졌구나. 올해 들어 벌써 오십 아홉 번째인가? 그 기분 충분히 이해해. 내가 좀 답답한 스타일인 것도 알고.
그렇지만 말야. 다른 사람들의 삶도 마찬가지라고. 너도 잘 알고 있잖아.
가끔 신이 나서 방방 뛸 정도로 삶을 즐기는 사람도 있긴 한데, 그것도 잠깐이야. 오래가질 못해. 50의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 좋은 일이 생겨 60의 행복을 갖게 되면 처음에는 너무 좋아하지. 이것이 바로 삶이야! 그러면서 우리를 자기 맘대로 정의하기도 하고 아침마다 자기가 먼저 달려와서 우리를 끌어안으며 하루를 시작하기도 한다구.
하지만 이런 사람도 보통 한 달 안에 더 이상 행복하지 않다고 해. 모든 게 당연한 일이 되어 버리니까 60에 만족하지 못하고 70을 바라고 80을 원하지. 그러면서 다시 삶은 재미없다느니 나의 삶은 왜 이 모양 이 꼴이냐느니 하는 식으로 괜히 우리를 탓하는 거야. 지금의 너처럼 말이지.
[성]
하지만 삶, 내가 바라는 건 그저 어제와 다른 하루라고.
60, 70으로 계속 점프하는 건 바라지도 않아. 내가 복권 당첨을 목표로 하고 사는 건 아니잖아? 그저 매일 조금씩 다른 삶을 살고 더 나은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아.
그렇지만 너는 그런 한 걸음의 움직임마저 허용해주질 않아. 피곤에 찌든 몸으로 깨어나 다시 피곤에 찌들 때까지 일하다가 잠자리에 들면, 나는 어제의 그 자리에 그냥 머물고 있을 뿐이야. 아니, 오히려 더 뒷걸음친 날도 적지 않지.
궁금해 난. 지금의 내가 어제의 나보다 나은 건지. 한두 달 전에 비하면 어떨지. 회사에 첫 출근한 날, 그 복잡한 지하철에서 그보다 더 복잡한 기분으로 너와 함께 흔들리던 나와 비교하면 어떤지 말야.
겉으로 보기에 나는 분명 나아지긴 했어. 회사 다니면서 돈도 벌고 있고 많은 것들이 안정되기 시작했지. 여전히 회사일은 쉽지 않지만 그래도 작년 이맘때의 불안함은 많이 내려놓은 것 같아. 하지만 삶, 네 눈에 보기에 어때? 난 제대로 나아가고 있는 걸까?
[삶]
네 물음에 솔직하게 답하자면, 너 별반 나아지지 않았어. 비슷해. 어제와, 한달전과, 심지어 첫 출근하던 날과 비교해서도.
그래, 나도 알아. 너 돈 벌기 시작한 후 바뀐 게 많다는 거. 최근에 핸드폰도 바꿨지? 예쁜 디카와 자전거도 새로 샀고. 옷도 대학생 때보다 조금은 고급스러워진 데다가 저녁에 먹는 안주까지 작년보다 나아졌더라고. 하지만 너도 느끼다시피 그걸 앞으로 나아가는 거라 할 수 없어.
돈을 버는 것과 쓰는 것은 삶의 원초적인 고리일 뿐, 그게 사람의 성장을 말해주지는 않아. 삶의 견지에서 보면 그건 벌고 쓰고를 계속 반복하며 제자리에서 그냥 돌고 있는 거야. 빙글빙글. 빙글빙글.
안타까운 건 많은 사람들이 결국 그 원을 그리기 위해 살고 있다는 거야. 피곤해하면서 돈을 벌고, 쉬면서 돈을 쓴 다음, 다시 피곤해하면서 돈을 벌지. 그렇게 모은 돈으로 자신을 치장하고 좋은 거 사먹고 해외여행도 다니면서 어때, 이만하면 더 나은 삶이지? 그러면서 스스로를 치켜세우지만, 난 동의할 수 없어.
돈벌기 - 돈쓰기 - 다시 돈 벌기의 지루한 돌림노래로 표현되는 삶이란 너무 처량해. 돈을 벌며 녹초가 된 정신과 육체를, 돈을 쓰며 위로하지 말라고.
[성]
그럼,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거야? 하루가 너무 짧아. 몸은 피곤하고 정신은 더 피로해. 나를 꽉 붙잡고 늘어지는 매일 똑같은 너에게서 벗어나는 게 정말 쉽지 않단 말야. 돈을 쓰는 것도 그래. 소비로 더 나은 자신을 만들지 못한다는 것은 알겠어. 하지만 그렇게라도 돈을 쓰며 스스로를 토닥거리는 게 뭐 그리 잘못된 일이냐는 거야.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사람들이 한국에만 수백만 명은 될 걸?
[삶]
알지. 소비가 사람의 숨통을 트이게 해준다는 것을 왜 모르겠어.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너도 내가 말하는 의도를 알고 있을거야. 돈벌기와 돈쓰기로만 가득 찬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걸.
그리고 성, 내가 너를 꽉 잡고 늘어지지는 않아. 우리들 삶은 애초에 손이라는 것을 갖고 태어나지 않았거든. 난 그저 네 옆에서 너랑 같이 걸을 따름이야.
내 조언은 단순해. 아무리 힘들고 매일매일 피곤해 죽을 것 같아도, 뻔한 원을 그리며 맴돌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자는 것. 순간의 즐거움과 위로를 위해서만 시간과 돈을 쓰지 말고 지금의 너처럼 더 나은 삶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며 어제와 다른 내일을 아주 조금씩이라도 만들어보자는 것.
네가 그런 의지를 꺾지 않는다면, 나도 더 기꺼운 마음으로 너와 함께 걸을거야. 언젠가 우리가 이별할 날이 올 때까지 매일 아침 기쁜 마음으로 너에게 달려갈게.
이게 바로 나, 삶이 오늘 네게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말이야. 이제 자야할 시간이거든.
[성]
원이 아닌 직선을 만들자는 거지?
그 방향이 옳은지 그른지를 확신할 수 없고 당장은 달라지는 게 없어 보일지라도 매일 더 나은 삶을 고민하며 어떻게든 한 걸음 앞으로 나가자는 말로 이해했어.
사실, 내일도 아침부터 밤까지 정신 없는 일상이 이어질텐데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어. 하지만 그것 밖에 답이 없는 것도 알 것 같아. 해보자, 해보자고.
그럼 내일 아침, 늘 만나던 거기서 또 만나자.
굿나잇.
[2005년 11월 5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