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를 다닌 지 얼마 되지 않은 20대 후반에 쓴 글입니다. 나름의 블랙 코미디를 추구하다 보니 다소 촌스러운 표현들이 있습니다만 크게 건드리지 않고 다시 올립니다.
시계가 밤 11시를 가리킬 무렵 현관문이 벌컥 열리며 시커먼 그림자가 방안으로 쏟아지듯 들어온다.
M군이다. 오늘도 야근을 한 모양이다.
M군은 현관의 약한 백열등 빛에 의지해 신발을 벗고 들어와 익숙해진 벽을 더듬어 방의 조명을 깨운다. 조용히 잠들어 있던 방이 눈을 비비며 일어난다.
오늘도 쉽지 않았던 하루. 멱살 잡는 싸움 따위는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몇 시간 동안 진흙탕 속에 사투라도 벌인 듯 몸이 나른하고 고되다. 회사를 다닌 다음부터 늘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오늘만은 여느 날처럼 바로 쓰러져서 잠을 잘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날은 M군이 고향별과 정기통신을 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M군은 냉장고를 열어 얼마 남지 않은 물통의 물을 깡그리 목에 쏟아 부은 후 책상 앞에 앉는다. 중요한 날이니 만큼 괜스레 긴장되는 기분이다.
M군은 불안한 눈초리로 좌우를 두리번두리번 살피기 시작한다. 혹시 누가 보고 있나 확인하기 위함이다. 물론 아무도 볼 리 없다.
책상 위에는 고향별을 떠나기 전 우주 비행장에서 찍은 사진이 놓여져 있다. 양손에 환한 꽃다발을 들고 꽃보다 더 환한 웃음을 짓고 있는 M군과 가족들의 모습이 보인다. 마치 어제처럼 느껴지는 풍경, 어느새 그윽한 향수에 취한 M군은 의자에 기대 지긋이 눈을 감는다. 고향별에서의 기억이 대장에서 십이지장을 거쳐 식도까지 그윽하게 역류해옴을 느낀다.
그렇다. 지금은 비록 평범한 지구인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고향별에서의 M군은 그야말로 촉망 받는 인재였다. 그는 구구단을 무려 스물 두 살 때 한 치의 틀림도 없이 완벽히 마스터함으로써 지역신문 사회란에까지 회자된 적이 있으며 심지어 중학교 3학년 영어 교과서를 중학교 2학년 때 예습함으로써 학교의 영재로 추앙받기도 했다. 한동안 M군이 고향별에 불었던 조기교육열풍의 원흉으로 지탄받은 것도 이 때문이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출전한 장학퀴즈 대회에서 태양계 행성의 순서를 묻는 최후의 문제를 아쉽게 틀려버려 장원을 따내지 못한 것이 단 하나의 오점이랄까. 정답은 '수금지화목토천해명'. 당시 M군은 너무 긴장한 나머지 '태종태세문단세'라 외쳐버렸다.
M군은 지구별에 온 후 스스로의 총명함이 예전같지 않다고 느낀다. 지구별의 좋지 않은 환경 때문이다. 어딜 가든 피할 수 없는 각종 독성물질들이 M군이 입을 뻥끗 벌릴 때마다 목욕탕 하수구에 물 빨려 들어가듯 침투, 온몸의 세포가 초절정순수희귀 성분인 '니코틴'으로 구성되어 면역력이 한 떨기 국화꽃처럼 약한 M군을 좌삼우삼 흔들어버린 것이다. 뇌세포가 손상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M군은 크게 개의치 않는다. 지금 그는 충분히 행복하다. M군은 미소를 머금으며, 책상 서랍을 뒤져 구석에서 주먹만한 검정색 물건 하나를 꺼낸다. 마치 조약돌 같은 모양새의 고향별과의 통신 장비이다. 책상 위에 놓고 익숙한 손놀림으로 만지작거리니 얼마 되지 않아 장비는 환한 빛을 내며 작동하기 시작한다. 연결이 된 것이다. 스피커도 없는 조약돌 모양의 장비는 맑고 쾌청한 음량으로 상대방의 목소리를 전달하기 시작한다.
“M군인가?”
“예… M입니다. M234-SXX-U22-NG2입니다.”
“굳이 풀네임을 말할 필요는 없네. 모르는 것도 아니니”
“예… 그렇군요. 다들, 잘 지내시죠?”
“아. 뭐 그렇다네. 자네는 어떤가?”
“여전히 바쁘죠. 뭐 그래도 신입사원 때보다는 낫습니다. 일도 제법 손에 익은 것 같구요. 저도 이제 지구별에서의 삶에 제법 적응한 듯 합니다”
“아. 그것 다행이구만. 그래도 일은 많지?”
“예. 여전히 일은 많습니다. 삶의 여유도 별로 없구요. 여기 사람들은 왜 이렇게 정신없이 사는 건지… 덕분에 저도 따라서 허덕이며 살게 되는 거 있죠. …참, 작년에 넣기 시작한 주식형 펀드가 요즘 수익률이 좋아요. 20%가 넘었답니다. 물론 요즘 증시가 하도 좋다 보니 직접투자 하는 사람들은 떼돈을 번 것 같던데요. 그래도 뭐 이만하면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것 참 잘 된 일이군.”
“예. 적금도 여름에 만기되니 이걸로 직접 투자도 배워볼까 생각 중입니다. 결혼하고 살림 차리려면 몇 년 동안 열심히 벌어야 할 것 같아요. …아, 도와 달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고향별에 손 벌리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저 잘 아시잖아요. 그리고 또 보고 드릴 게… 아, 7월 말에 여름 휴가가 있습니다. 친구들과 놀러 갈지, 혼자 여행을 갈지, 아니면 집에서 책이라도 보면서 쉴지 아직은 결정 못했어요. 특별히 할 일이 정해진 것은 아닌데, 그래도 기분은 좋습니다. 휴가잖아요.”
“…”
“듣고 계세요? 오늘은 지난 보고 때보다 조용하시네요? 지난번에는 세세히 보고하지 않는다고 꾸중하셨지 않습니까?”
“그래, 그랬었지…”
“ 무슨 일 있는 겁니까? 분위기가 이상한데요?”
“…M군. 이런 말 하기 미안한데, …자네 이제 돌아와야겠네.”
“예?.. 도.. 돌아오라뇨? 갑자기…”
“그렇게 되었네. 고향별의 방침일세”
고향별의 방침이라면 거역할 수 없다. M군은 잘 알고 있다.
“오늘로부터 일주일 뒤, 자네를 태우러 갈 것일세”
“아, 아니 그렇게, 그렇게 빨리요?”
“고향별의 방침일세. 자세한 이유는 돌아오면 말해주겠네. 시간이 촉박해서 미안하네만 남은 날 동안 주변 일들을 깨끗하게 정리해 놓으시게.”
“…정말 너무하십니다. 이렇게 갑자기 그러시면…”
“알잖은가. 통보를 하고 소환하는 것도 우리로서는 큰 배려일세… 말 한마디 안하고 소환되는 이들도 부지기수이고. 자네는 그 동안의 평가가 매우 좋았기에 이별의 시간을 허락해주는 것 뿐, 오히려 고향별의 배려에 감사해야 할 것일세.”
“…예.”
“그럼 지금으로부터 일주일 뒤, 그러니까 다음주 목요일 오전 8시, 자네가 처음 지구별에 내린 그 곳에서 기다리게.”
“...”
“좋아. 자네는 고향별의 기대주. 지구별에 평생 머무르게 할 수는 없지. 그럼 돌아와서 보세나.”
뚝.
어느새 조약돌 모양의 통신기기는 빛을 잃었다. 연결이 끊어졌다.
퇴근할 때부터 지쳐서 기운이 없던 M군이었지만 지금은 조금 남아있던 기운마저 진공청소기로 빨아 당겨진 기분이다.
고향별의 결정은 절대적이다. M군이 이 결정을 부정하든, 저항하든, 도망치든, 맞서 싸우든 결론은 동일하다. 일주일 뒤면 그는 여기에 없을 것이다.
허무한 표정으로 방을 둘러본다. 방안의 사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책장에 쌓여 있는 책들과 선반에 놓여 있는 물건들, 행거에 가득 걸려 있는 옷들과 아직 뜯지 않은 택배박스까지. 어떤 것들은 정말 어렵게 구하였고, 어떤 것들은 즐거운 추억이, 어떤 것들은 슬픔과 안타까움이 담겨있다. 크고 작은 하나하나가 저마다의 이야기를 갖고 있다.
책상 위에 놓인 핸드폰을 무심결에 들고 통화 목록과 전화번호부를 확인한다. 많은 이름들. 이 한 사람 한 사람과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만들었던가. M군은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언젠가 고향별에 돌아가야 한다는 것은 지구별에 올 때부터 정해져 있던 운명이었다. 돌아가는 날이 갑자기 결정된다는 것 또한 익히 알고 있었다. 왜, 이 중요한 것을 망각하고 그렇게 아등바등 살았을까. 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상처를 입으며 살았을까. 왜 좋아하는 일을 뒤로 미루고, 별 것 아닌 일에 시간과 감정을 쏟았을까. 후회와 아쉬움이, 기어코 터져 나온 눈물과 함께 쏟아져 내린다.
그리고, 오랫동안 마음에 담았던 그녀의 얼굴도 떠올랐다. 그쪽에서도 계속 호감을 보여왔으니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용기 내서 고백이라도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아니다. 어차피 헤어질 걸 시작도 안 한 것이 차라리 잘 한 일이겠지.
남은 건 고작 일주일. M군이 결론을 어떻게 내리든 이제 바뀌는 건 없다. 그는 마치 처음부터 이 세상에 없었던 것처럼 조용히 사라질 것이고, 주위 사람들도 한동안은 M군을 기억하고 M군을 이야기하겠지만 몇 달, 아니 몇 주만 있어도 그를 떠올리지도 않게 될 것이다.
M군은 쏟아지듯 침대 위에 쓰러진다. 잠이 쏟아진다. M군은 모든 것이 그저 꿈이었으면 좋겠다 생각하며 잠을 청한다.
갑자기 고향별과 통신하는 장비가 점멸하기 시작한다.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뜻이다.
이미 깊은 잠에 떨어진, M군의 눈물로 얼룩진 얼굴 위로 통신 장비의 빛이 번졌다, 사라진다.
[2007년 6월 25일]
